당시 학장으로 재직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기준 전 총장 엔지니어하우스에서 신공학관을 바라보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어 1990년대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제가 학장이 되어서 우선적으로 했던 일은 칸막이가 너무 심한 학과를 통합해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전기공학과, 전자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를 합쳤습니다. 학부생 교육을 중심으로 하자는 기본 철학이었는데 무엇보다 민홍식, 권형식, 한송엽 학과장과 교수들의 소통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incentive를 주기로 했어요. 예산도 많이 주고, 교수 TO도 세 명을 새로 주었어요. 그리고 내부개혁을 위해서 교수 연간 업적 표라는 교수 평가표를 만들었어요. 공학연구소는 정책연구소로 바꾸고 싶어서 산업공학과 이면우 교수에게 소장을 맡겼는데 이면우 교수는 워낙 능력이 탁월해서 전체 교수회의에서 공대 개혁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후에 연구지원 소를 세워서 권욱현 교수에게 소장을 맡겼고요. 당시 권욱현 교수는 혼자 100만불 이상의 연구비를 받아 업적을 내 는 몇 안 되는 교수였습니다. 이면우 교수는 91년에 공대백서를 발간했는데 공학교육과 과학기술정책을 비판하는 내 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죠.

 

공대백서의 사회적 파장이 꽤 컸을 듯한데요.


이기준 전 총장 공대백서가 나오자 청와대와 교육부, 과기부에서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당시 공대 동문인 서정욱 박사가 과기부 차관이었고 김진현 씨가 장관이었어요. 장관을 만나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서 신공학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젊은 학장이었는데 원로교수들이 적극 지원을 해 줬어요. 왜냐하면 원로교수들에게는 아픈 경험이 있는데, 서울공대를 MIT처럼 만들기 위해 자연과학대와 합치자는 정부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결과적으로 KAIST가 만들어져 정부의 엄청난 재정지원을 받게 되었죠. 그래서 원로교수들도 적극 지원해주니 제가 건축학과의 김진균 교수에게 부탁해서 설계도를 멋있게 그려달라고 부탁해 그 제안서를 가지고 정부를 적극 설득했습니다. 이게 10년 내 서울공대를 지금의 두 배로 키우는 프로젝트의 시작이 되 었고 그게 신공학관 건립으로 결실을 맺었지요.

 

신공학관 프로젝트 때 동창회 역할이 꽤 컸던 것으로 아는데, 동창회와 공대는 언제부터 가까워졌습니까?

 

이달우 회장 신공학관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기준 학장님과 자주 만나서 의논하고 동창회와 학교가 아주 친해졌습니다. 그 전에는 별로 친하지가 않았어요. 그 당시에 저는 전기과 동창회장 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교수가 저를 공대 동창회장으로 추천해서 동창회장이 되었어요. 제가 민간출신으로는 처음일 거예요. 동창회에 엄청난 변화이죠. 그 전에는 동창회장이 바뀌지 않고 오래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간사장이 일을 다 하는 굉장히 경직된 조직이었어요. 이제는 동창회가 동창회답게 대학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지요.

 

이기준 전 총장 제가 61년 졸업생인데, 학장이 되고 91년에야 30주년 홈커밍데이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동창회와 가까워져야만 행사를 잘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동창회원들이 저한테 돈을 모아줬는데 그 비용으로 우선 원로교수님들 모시는 방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학장실에 있던 큰 TV를 휴게실로 옮기고 당시에는 없던 교수에게 주는 ‘훌륭한 공대교수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모 두 동문들이 모금해준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는 홈커밍데이가 이어지지 못했어요. 똑똑한 사람은 많은데 구심점이 없었던 거죠. 다시 시작하게 된 건 2011년에 개최된 50주년 행사였습니다. 50주년이 되면서 조직이 더 커졌는데 그만큼 발전기금 모금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모금은 사실 30주년이 더 수월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엔지니어하우스에 헬스클럽을 설치하느라 예산이 충분치 않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도 5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이달우 회장님께서 기꺼이 찬성을 해주신 덕이 큽니다. 원로 대선배님들이 결정권을 갖고 있으면 말도 못했습니다. 그 분들이 “안 돼.” 그러면 끝이니까요. 이달우 회장님이 동창회 일 을 잘해주셨고, 사실 저는 6회 선배님들의 애교심이 최고라고 생각 합니다. 서울공대 졸업생 중에 제일 대학을 사랑해주신 분이에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엔지니어하우스


이달우 회장 제가 동창회장을 하면서 느낀 것이 힘을 모으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착수하게 된 사업이 동창회관 건립입니다. 동창회관이야 당연히 공과대학 동창회의 건물이겠지만 이것만 생각하면 동창회로서의 시야가 좁다고 생각해 엔지니어하우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실은 동창회 기금이 넉넉하지는 못한 편이었어요. 당시에는 필요에 따라서 기금을 모았거든요. 그런데 사업을 하려면 일단 기본비용을 모아야 했어요. 결과적으로 무일푼에서 시작해서 엔지니어하우스를 완성하는데 37억이 들어갔습니다. 엔지니어하우스는 우리 공과대학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상징적인 창조물이에요. 일반적으로 37억을 모금하라면 다들 당황해 할 테지만, 저는 이미 사업을 하고 있던 터라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에 굉장한 가치를 두고 또 실현해 왔기에 건립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립 당시 제가 내 걸었던 ‘민족 힘의 원천’이라는 엔지니어하우스의 철학은 참으로 적절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공과대학에서는 세계적 인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까 들어오면서 홍보물을 읽어보니 오늘날에도 딱 들어맞는 이야기더군요. 후배님들이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권위를 세우고 있다는 점이 정말 뿌듯합니다. 언젠가 학장님께 들은 것 같은데, 한 번은 동경대, 베를린대 총장과 엔지니어하우스에서 점심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을 동창들이 지었다고 하니 그 총장들이 교문을 나서면서 ‘엔지니어하우스가 제일 부럽다’고 했답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들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개인적인 일에만 몰두하기보다 서로 손을 맞잡고 협력하는 그런 일들이 좀 더 필요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엔지니어하우스가 그런 상징물로서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엔지니어하우스에는 웨딩홀도 있지 않습니까. 그곳이 처음에는 음악 감상실에서 시작됐다는데  사실입니까?


이달우 회장 저는 예전부터 음악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어요. 우리 분야가 이성적인 작업이 많기 때문에 음악 감상을 통해 긴장을 이완하면서 감성적인 부분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엔지니어하우스에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음악 감상을 하면 음대 학생들이 와서 해설도 하고 연주도 하고, 그러면 공대 학생들도 같이 음악 듣고 어울리는 그런 장소요. 음악 감상이라는 것이 꽤 유행하던 무렵이었어요. 젊은이들이 음악 감상실에 올 수 있도록 홀 하나를 그런 용도로 쓰자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스피커가 필요했는데 국내에는 당시 좋은 물품은 중고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음향기기 전문기업인 매킨토시에 편지를 썼습니다. 공과대학 출신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게 소원인데 특별히 좋은 제품을 만들어달라고요. 그런데 여차저차 하다 보니 애초 구상했던 것보다 방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결혼식장 용도로 사용되고 있고, 웨딩마치에는 매킨토시가 쓰입니다. 결혼식장 참 괜찮은 아이디어 아닙니까? 졸업생들이 사용하니 동창회관이라는 목적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공대 학생들 또한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엔지니어하우스 건립 당시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이달우 회장 현재 엔지니어하우스가 원래는 소나무 숲이었거든요. 공대를 여기에 짓고 싶지는 않았어요. 총장이나 사람들도 전부 싫어했습니다. 공대가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해서, 높은 빌딩이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돈을 적게 들이면서 면적을 크게 하는 건축기법을 썼는데, 그러다보니 건물에 소리가 울려서 포장을 했으면 싶었습니다. 지금이야 막아서 2층에서 소리가 안 들어오게 하고 있지만 유리라는 게 소리 흡수 능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면 소리가 울립니다.

그걸 막는 방법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 했습니다. 이걸 지을 때 몇 차례 변경이 있었어요. 공대 건축과 출신 중에 공일건이라는 동문이 있습니다. 제가 우연히 회사 공장 설계를 그 사람한테 맡긴 적이 있던 터라 믿을 만했어요. 수정을 반복해서 나도 만족하고, 그 사람도 만족하는 안이 나왔는데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 위원회에 통과해야 해요. 그런데 퇴짜를 맞았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이라는 공일건이라는 사람을 놓고 20번이나 고친 안인데 반대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싶었죠. 건축과의 김진균 교수더군요.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학장하고 넷이 만나서 이야기를 했어요. 잠 깐 이야기를 해보니 김 교수가 반대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 을 깨달았습니다. 건축전문가들끼리 한번 얘기를 해보라 하고 저 녁 값을 대주고 나왔죠. 다음날 공일건 씨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 요. 이 친구 첫마디가 김 교수 의견도 일리가 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MIT에서 미국기술을 공부한 사람이고, 공일건 씨는 서울공대 출신이죠. 둘이  지향하는 바가 좀 다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김 교수하고 상의해서 엔지니어하우스를 설계 하시오.” 했죠. 큰 아이디어는 김 교수 것이었고, 디테일은 공일건 동문 것이었죠.

 

이기준 전 총장 당시 가장 큰 차이는 뭐냐 하면 공일건 동문은 주차장 마당에다가 convention한 빌딩을 지으려고 했고, 김 교수는 사면을 정리하려고 한 것이었어요. 공간을 확보하는 의도였던 거죠. 공일건 동문이 아이디어가 좋다고 받아들여 기본은 김 교수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마감은 공일건 동문이 맡았어요. 당시에 제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며 처리한 기억이 납니다.

 

신공학관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기준 전 총장 처음에 공대하고 농대는 관악으로 안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마디 한 게 온 큰 이유가 됐어요. 제가 75년 쯤, 평교수였을 때 당시 학장님과 대화하다가 “공대는 관악으로 안 가기로 정했다”며 제 의견을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관악으로 가면 독립적인 예산운용이 힘들어지지만 관악으로 안가면 공과대학이 정부 에서 예산을 별도로 받든 해서 예산 독립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산 독립이 가능하면 그렇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여 기서 망하는 거라고요. 그랬더니 공대가 관악으로 안 가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으시더군요. 저희가 없으면 공과대학 하나 또 만들지 않겠냐고 말씀드렸죠. 이이야기가 학장 및 참모진 생각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1980년이 되어서야 제일 늦게 공과대학이 지어졌습니다. 그것도 75년 건설 단가로요. 와서 보니 금이 쩍쩍 가 있더군요. 그래서 같은 설계를 가지고 두 회사가 하는데 서로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례를 고려해서 신공학관을 지을 때는 어떤 건설회사에 맡길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조달청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건설회사가 담합을 해서 단가 대비 우수하게 짓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철근 콘크리트로 높게 지으면 괜찮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그걸 지을 수 있는 데가 여섯 곳밖에 없었는데 그 중, 현대랑 LG가 맞붙었습니다.  

LG가 와서 하는 이야기가 저번에 현대가 양보했기 때문에 이번에 자 기가 양보할 차례래요. 그런데 지어놓고 보니 여름에 물이 방으로 콸 콸콸 흘러 들어오는 거예요. 전화해서 소리를 막 지르고 이따위로 해 서 되겠냐고. 참 웃겼어요. 현대 정주영 회장 밑에 있는 비서실에 얘 기 한 번 했어요. 이 건물 제대로 안 지으면 가만히 안 있겠다, 현대 산업개발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압력을 넣었죠. 그랬더니 신경 을 많이 썼는지 이후 서울대학교에 있는 꽤 많은 건물을 현대가 했습니다. 신공학관 역시 지어놓고 보니깐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됐어요.

 

이달우 회장 엔지니어하우스 건설과 관련해서 남기고 싶은 얘기가 두 개 있는데, 전할 기회가 없었어요. 기부한 사람 중에 내 기억에 남는 사람이 둘이 있어요. 한 사람은 화공과 출신인데 그 당시에 대기업에서 일을 하다가 암에 걸렸어요. 그래서 대기업을 퇴사하면서 퇴직금을 받아왔는데, 퇴직금의 반 정도를 기금으로 가져왔어요. 너무 과하다고 병 치료도 해야 하고 이건 다 필요 없고 일부만 내라고 했죠. 그런 고마운 사람도 있었어요. 또 한 사람은 전기과 동기생인데 이 친구는 전남대학교 교수로 갔는데, 첫 월급을 탔다고 다 가 져왔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좋은 시설을 갖게 된 겁니다. 뜻이 좋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나선 거예요. 정확히는 37억 모았습니다.

 

서울공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이달우 회장 최근 국가관이 상당히 흐려진 것 같아요. 자기가 태어난 곳이 어디냐고 생각을 하면 자기 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가 있고, 그 위에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건데 공동체를 지키려는 생각이 흐리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 젊은 사람들한테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공대 학생들에게는 요새 공대가 예상외로 많이 뜨고 있는데 그 밖의 영역에서도 왕성하게 리드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제게는 주력 분야 외의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전기과를 나왔지만 ‘올해의 기계인’ 이라 는 상을 탄 적도 있어요. 다양한 도전이 필요합니다. 한국은 발전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전체적인 균형이 이루어져야지 한 분야로 는 부족합니다. 이를 위해 젊은 학생, 후배들이 노력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기준 전 총장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나라 중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국입니다. 누구든지 위기의식을 갖고 있죠. 남녀를 불문하고 군대 가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현재 상태에서 첫째는 이스라엘이지만 둘째는 대한 민국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옛날 어려웠던 시절을 너무 몰라요. 위기의식이 너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30, 40, 50대까지가 고생을 많이 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것이 큰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깐 주변 세상의 흐름과 역행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중국에 왔다 갔다 하는데 중국 에 갈 때마다 중국의 변화를 보면서 10년 후 15년 후 중국의 2030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보며 우리나라가 여러 면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정책이 잘못 되어 취직이 안 된 다고 하지만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고 넓은 세상에 가서 할 일을 찾았으면 해요.

앞으로 넓은 세상에 나가서 일하면 우리의 능력이나 여건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펼칠 수 있습니다. 꼭 서울대학교가 아니어도 됩니다. 저는 입시정책을 바꾸는 데 서울대학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시험을 봐서 성적이 우수한 게 진짜 잘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교육부가 대학에 관여하기 보다는 대학이 큰 그림만 그리고 알아서 입학정책을 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어요.

 

100호를 맞이한 「서울공대」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기준 전 총장 「서울공대」는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많이 이야기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서울공대 웹사이트나 공대 동창회 웹사이트가 너무 오래되었는데 개편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최근 공과대학 웹사이트가 개편 되었습니다 - 편집자 주). 동창회도 서울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면 좋겠고요. 동창회는 세상 돌아가는 거에 대한 OB들이잖아요. 그리고 동창회 역대 회장님 명단이 없어요. 그거 찾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없더군요. 한국의 큰 문제점이 뭐냐면 이름을 잘 바꿔요. 수백 년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을 바꿔놓으면 안 됩니다. 저는 이름에 정체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서울공대」라는 이름을 안 바꾼 것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100호까지 왔다는 게 대단해요. 지금 보니 상당히 좋아졌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래기술에 대한 이야 기가 다소 적은 듯합니다. 신기술은 가시적으로 눈에 보여야 한 다 고 생각해요. 기술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것 말이죠. 집에 가면 미래 기술에 대한 건 나보다 아내가 더 합니다. 저는 SF영화 나 미래를 그린 영화를 보면 너무 가짜처럼 느껴져서 잘 보지 않았 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그 황당해서 웃던 것들이 다 현실이 되었어요. 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달우 회장 혹시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25년간 만들어 놓은 식물원을 보여드릴게요. 직원들이 이름을 상효원으로 지었어요. 요즘 제주의 명소가 되고 있어요. 개원 이틀 후에 산림청 간부들 스물 몇 명이 와서 쭉 한 바퀴 돌더니 이건 제주 제 일 가 는 명소가 될 것이라 하더군요. 상효원은 대지가 8만 평인데 제가 그동안 에 세계에 여러 곳을 다녀보니깐 대개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내 지 두 시간이지 그걸 넘어가면 사람들이 지루해서 못 다니더군요. 그래서 8만평 같으면 한 바퀴 돌면 두 시간 이상 걸려요. 그래서 반 만 했습니다.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여자는 한 시간 이십 분 정 도 걸립니다. 공학도가 낯선 제주에서 낯선 분야인 식물원을 열었으니 언제라도 한 번 들르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서울대 공과대학 70주년, 「서울공대」 100호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