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소식

90년대 장비에 맡긴 반도체 미래, 서울대 연구실엔 ‘고장’ 딱지가…

尹대통령은 인재 양성 속도 내라지만, 서울대 연구 현장 가보니

 

한달째 잔고장… `사용 불가` 붙은 서울대 반도체 장비 - 10일 오후 5시쯤 찾은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에서 박유경 선임팀장이‘장비 사용 불가’문구가 붙은 포토 장비‘스테퍼’를 바라보고 있다. 스테퍼는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웨이퍼 위에 빛을 쪼여 원하는 형태로 배선을 그리는 장비다. 반도체 제작 과정에서 필수적인 장비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스테퍼는 1995년에 제작된 장비로 2005년 국내 모 기업이 서울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장비는 지난 한 달간 계속 잔고장이 나고 있다고 한다. /박정훈 기자
 
한달째 잔고장… '사용 불가' 붙은 서울대 반도체 장비 - 10일 오후 5시쯤 찾은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에서 박유경 선임팀장이‘장비 사용 불가’문구가 붙은 포토 장비‘스테퍼’를 바라보고 있다. 스테퍼는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웨이퍼 위에 빛을 쪼여 원하는 형태로 배선을 그리는 장비다. 반도체 제작 과정에서 필수적인 장비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스테퍼는 1995년에 제작된 장비로 2005년 국내 모 기업이 서울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장비는 지난 한 달간 계속 잔고장이 나고 있다고 한다. /박정훈 기자

지난 8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관악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한 회의실. 한 직원이 반도체 공정 장비인 ‘E-빔(BEAM) 리소그래피’가 고장 났다고 보고하자, 직원과 교수 등 참석자들 사이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장비는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빛으로 웨이퍼에 그림을 그리는 기능을 하는데, 반도체 회로 폭을 10억분의 1m 이하로 생산하는 ‘나노 공정’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 장비다. 하지만 서울대 전체를 통틀어 하나만 있다. 30억원 상당의 고가 장비이고 점검받는 데만 연간 1억원씩 든다.

하지만 이 장비는 도입한 지 무려 15년 된 것이다. 이날 회의에선 “너무 낡았는데 이제는 최신 장비로 바꾸자고 합시다”란 의견도 나왔지만, 당장 뾰족한 대안이 없어 고쳐 쓰기로 했다. 이 연구소의 교수나 석·박사 등이 낡은 장비 문제로 머리를 싸매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나마 이 장비는 신식이라고 한다. 연구소 관계자는 “학교에서 쓰는 반도체 관련 장비들이 워낙 낡아 잔고장이 잦다 보니 2주에 한 번 있는 회의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절반가량이 장비 고장이나 수리 계획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하나뿐인 이 필수 장비가 고장 나는 바람에 연구소 석·박사 학생들의 프로젝트가 상당수 일시 중단돼 있다. 반도체소자 공정 관련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김모(26)씨는 “기업이나 다른 대학 연구소 등에 수소문해서 빌려 오거나, 장비가 수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10일 오후 4시쯤 서울 관악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에서 한 연구원이 고장난‘E-빔(BEAM) 리소그래피’를 살펴보고 있다. 이 장비는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웨이퍼 위에 빛을 쬐여 원하는 형태로 배선을 그리는 포토 장비로, 서울대는 2007년 구입해 16년째 사용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10일 오후 4시쯤 서울 관악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에서 한 연구원이 고장난‘E-빔(BEAM) 리소그래피’를 살펴보고 있다. 이 장비는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웨이퍼 위에 빛을 쬐여 원하는 형태로 배선을 그리는 포토 장비로, 서울대는 2007년 구입해 16년째 사용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연일 강조하면서 정부가 반도체 인재 양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교육부는 9일 “반도체 관련 학과의 정원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반도체 교육을 담당할 대학가에선 이것으론 부족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학생 수를 늘려 봐야 제대로 배울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본지는 최근 서울대 반도체 관련 분야 교수와 대학원생 10명에게 대학의 반도체 교육 실태에 대해 물었다. 국내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서울대에서 국가 대표 기간산업인 반도체 분야를 이끌 채비를 하는 교수나 석·박사 학생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울대에서조차 매일같이 ‘장비가 고장 나진 않을지’ 전전긍긍하거나, 하나밖에 없는 장비를 쓰려고 줄을 서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정원을 늘리기 전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장비나 시설부터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학생을 늘려도 가르칠 교수가 없다. 이미 늦었다”는 반응도 있었다.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웨이퍼 위에 빛을 쪼여 원하는 형태로 배선을 그리는 ‘포토 장비’는 반도체 연구의 기본이 되는 장비다. 반도체 공정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정교한 공정이 가능한 신식 장비들이 기업에 도입되고 있지만, 서울대는 이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연구소에는 일부 최신 장비도 있지만 장비가 비싸 기업에서 쓰던 걸 기증받거나 구입한 수십 년 된 구식 장비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잔고장도 잦고, 성능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박유경 반도체공동연구소 선임팀장(박사)은 “농구로 치면 농구공 같은 장비인데, 농구 선수는 100명인데 농구공이 1개만 있는 것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석사생 송모(25)씨도 “장비는 몇 없는데 쓰려는 학생은 많아 새벽에 나와서 장비를 쓰는 경우도 번번이 있다”고 했다. 현재 고장 나 사용하지 못하는 ‘스테퍼’라는 장비는 1990년대에 생산돼 2005년에 서울대에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당시 모 기업에서 사용하던 것을 서울대에 기증 형태로 줬다고 했다.

김성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반도체 산업은 인공지능 연구 등과 달리 대형 장비가 필수적인 ‘장비 중심적’ 제조업이라, 반도체 분야 인재 한 명을 키워내기 위해선 고가의 첨단 장비나 반도체를 생산하는 ‘클린룸’ 같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며 “지금 400여 명의 석·박사 학생들이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는데, 이 규모도 겨우 감당할 만큼 장비가 낡고 수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했다.

고가의 대형 장비가 동원되지 않는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도 서울대 석·박사들이 눈치작전을 벌인다고 한다. 설계 때 쓰는 프로그램 라이선스가 부족해서다. 라이선스 개수만큼 접속 가능한 아이디(ID)를 발급해주는데, 학생 수보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도체 설계 자동화 관련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원모(26)씨는 “연구실에 인원이 17명인데 설계 프로그램(툴)을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가 12개뿐”이라며 “동시 접속이 안 돼 설계 프로그램을 쓰려면 다른 사람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교수, 석·박사들 사이에서는 “학생이 늘어도 정작 가르칠 교수가 없다”는 지적도 많았다. 교수가 62명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의 작년 기준 학부생은 1031명, 대학원생은 505명이다. 교수 중에는 반도체 분야를 맡지 않거나 정년을 앞둬 대학원생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학부 과정에 마련된 ‘전자회로’ ‘기초 회로 이론’ 등 반도체 관련 전공 필수 과목에는 수업당 100여 명이 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토론은커녕 교수가 학생들 과제 평가 하기에 급급하다고 한다.

대학원 일부 연구실은 이미 꽉 차 지원자가 있어도 학생을 더 받지 못하는 곳도 있다. 반도체 소자 및 재료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오모(27)씨는 “반도체 소자 분야의 경우 유망하다고 하지만, 정작 대학원을 희망하는 학생에 비해 교수 수가 부족해 학부 때부터 연구실에서 인턴이라도 해보려고 경쟁이 벌어진다”며 “대학원에 와도 교수 수가 부족해 졸업 프로젝트, 면담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고 했다.

신형철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반도체는 기업이 워낙 잘하고 있다는 인식이 커서 대학에 대해서는 정부도 장기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서 “기업이 오히려 학교보다 연구 수준도 높다 보니 반도체 분야 교수를 하지 않고 다른 분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출처 :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6/11/J4NCAGEZWZBRRLAU34WWWUGVJQ/?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