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습니다

한승헌 동문님, 반갑습니다. 서울공대지 독자이신 동문들께 간단히 현재 동문님의 근황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2001년부터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1월부터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기술분야 종합 국책연구소로서 연구원만 800명이 넘는 큰 조직인데, 여러 가지 당면 현안들이 많고 또 중요한 시기에 원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수로 자유롭게 있을 때보다 제가 책임지고 결정할 일들이 많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1980년에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진학하셨는데 당시 토목공학을 선택하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토목공학과를 선택한 계기가 처음부터 아주 확고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80학번으로서 마지막 본고사 세대인데 우리 때는 계열별로 공대에 들어왔어요. 공학계열 정원이 700명으로 2학년 올라가면서 과 배정을 받는데, 과 배정을 받는 기준은 1학년 때 학점이었어요. 학점이 중요도가 제일 크고, 그 다음에 입학성적, 본고사성적 순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본인이 1지망, 2지망, 3지망을 쓰게 되는데 성적이 좋으면 1지망을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토목과를 택한 중요한 계기는 저희 아버님이 토목기술자고, 그 당시에 저의 매형이 서울대 토목과 74학번 동문이셨기 때문에 영향을 좀 받은 거 같아요. 그 당시에 토목과는 성적이 중간보단 조금 높았어요. 건축과는 당시 Top 3였고 토목공학과가 토목전공, 도시전공 두 개 전공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저는 도시전공을 선택했죠. 토목 중에서도 도시전공이 그 당시에는 도시 계획, 교통, 환경, 측량 등의 분야를 다뤘으니까 전통적인 토목보다는 좀 소프트하게 보였어요. 토목 중에서 스마트한 토목이 뭘까 해서 그때 도시전공으로 전공을 택했죠. 당시에는 전공 택할 때 아주 뚜렷한 건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확실히 토목공학이 지금보다는 상당히 선호도가 좋았어요. 중동 건설 붐이 있었고, 취업도 잘 됐고, 아무래도 70년대 80년대 그때가 우리 건설의 피크, 터닝 포인트였어요. 전공의 선호도도 좋았고 지금보다는 상당히 전공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던 시절이었어요.


대학생 시절의 생각나는 은사님이나 동료, 선후배가 있으신지요?


대학 시절에 생각나는 은사님은 박창호 교수님입니다. 故박창호 교수님이 토목학회장도 하셨고, 우리나라 교통분야의 선구자셨어요. 저희 학창시절은 좀 어두운 시절이었어요. 저희가 1학년 들어왔을 때가 80년도 봄이었는데 두 달 만에 휴교령이 내려졌어요. 휴교 하자마자 바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고. 거의 5개월 정도 휴강을 했어요. 2- 3학년 그 시절에도 캠퍼스에 전투경찰들이 진주해 있었어요. 이 시절에도 박창호 교수님 같은 분들이 학생들을 마음속으로 많이 걱정해주시고, 그 당시에 상당히 흔들리는 우리 젊은 학생들에게 용기도 북돋아 주시고 앞으로에 대한 비전도 주셨어요. 돌아가신 윤준섭 교수님도 생각납니다. 윤 교수님은 도시계획 분야를 가르치셨어요. 상하수도 분야 정태학 교수님, 토목 전공에 장승필 교수님도 계시고요. 장 교수님은 학교로 오신지 2~3년 정도 되셨을 때인데 동역학을 가르치셨어요. 제일 어려운 과목이었고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런 은사님들이 생각나고 선후배로는 우리 80학번들이 좀 유명한 친구들이 많아요. 4대강 반대론자로 시민운동 하는 박창근 교수가 있고, 교통학회장하는 최기주 교수도 있고, 고려대에서 환경을 가르치는 김지영 교수도 있어요. 저는 공무원을 하다가 학계로 왔지만 정부나 공공기관으로 나간 분은 많지 않아요. 지금 국토부 혁신도시기획단 부단장을 하고 있는 장영수 박사 정도가 생각납니다. 지금 청와대 김수현 사회정책수석도 있네요.
후배 중에 제일 기억나는 친구는 1년 후배인 故강관수 교수가 있어요. 토목과를 오게 된 것도 저를 따라온 거에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세부 전공까지 저 바로 1년 후배로 저를 따라온 친구입니다. 강 교수의 아내는 우리 집사람 친구에요. 강 교수가 우리집 집들이 때 찾아왔다가, 우리 집사람 친구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죠. 이길성 교수님 연구실에서 수자원분야 박사학위를 받고, 초당대학교 교수로 부임해서 갔는데, 1998년에 학생들과 엠티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에서 낙상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후배 중에 제일 지금도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학창시절의 추억이 있으시면 한 두 가지 소개부탁드립니다.


우리 때는 사실 별다른 추억이 많이 없어요. 축제도 없었고, 학교에서 모이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요. 요즘 말하면 ‘딴따라’ 하며 노는 친구들은 상당히 손가락질 당했고, 또 도서관에 가서 공부만 하는 친구들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일종의 회색지대에 놓여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어두운 추억은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 동기 중에 황정하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지금은 서울대 민주열사 33인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 3학년 때 도서관에서 데모를 주동하다가 추락사했어요. 데모를 하면서 중앙도서관 6층 난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데 주위에 경찰들이 몰려들어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추락했어요. 83년 11월 달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그 친구가 기억에 남네요. 동기들이 대학 졸업해서 각자 자기 삶을 찾아가는 게 용할 정도로 학부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나중에 유학가서 정신차려서 공부했거나, 아니면 저처럼 산업체 갔다가 공무원이 되려고 마음먹고 뒤늦게 고시 준비해서 됐거나 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요즘 학생들처럼 1학년 때부터 스펙관리하고, 열심히 영어 스킬 쌓고, 1학년 때부터 난 고시를 준비해야지 했던 시절은 전혀 아니었어요. 그게 저희가 살았던 시절이었어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1987년”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저희는 훨씬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대학교 4년 내내 그랬어요.

 

졸업 후 건설회사에서 근무하시다 기술고시를 통해 건설교통부 공무원으로 근무하셨습니다. 당시 건설회사 현장 경험과 중앙부처 공무원 생활이 어떻게 연관이 되었나요?


대학교 4년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까 당시 현역으로 군대에 가기 싫었던 사람들은 대학원을 진학했어요. 그 당시에는 석사를 마치게 되면 6개월 군에 가서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하는 병역특례가 있어서 대학원을 많이 갔고, 저처럼 산업체 병역특례로 해외 나가서 5년 근무하는 대체복무도 많이 선택했습니다. 저희 때는 데모하다 잡혀서 현역으로 입대한 몇몇 친구들 말고는 대부분 4학년까지 다니고 절반은 대학원 가고, 절반은 산업체 병역특례로 저처럼 건설업체에 취업했어요.
저는 취업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건설현장에서 근무하면서 정신을 차린 경우입니다. 해외 건설현장에서 외국 엔지니어들을 만나서 같이 부딪치면서 제가 아무것도 아닌 걸 깨달았어요. 서울대 공대 나왔다고 자랑했지만 현장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한번은 현장 소장님이 저한테 “영국인 감독관에게 보내는 공문레터 한 번 써봐!” 이러는 거에요. 레터를 생전 처음 써 봤는데 이게 무슨 내용이냐고 빨간펜으로 쫙 그어버리니까 정말 자존심도 상하고 내가 별 거 아니구나 알게 되었어요. 사실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배운 것이 거의 없었는데 현장에서 실질적인 것을 많이 느끼고 배웠어요.
해외 2년 근무 끝나고 국내 현장에서 3년 근무를 더해야 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5년 병역특례 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고민해봤어요. 해외현장에 가서 근무해 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전혀 그런 동기가 없다가 해외현장을 가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어 공부도 더 하고 싶어 유학 준비를 했는데 실제적으로 준비가 잘 안됐어요. 공무원으로 퇴직하신 아버님은 제가 대학교 다닐 때부터 공무원을 하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귀에 안 들어왔어요. 할 게 없어서 공무원 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고 당시에는 저희가 정부에 대한 네거티브적인 생각이 많았잖아요. 학교 다니면서 5공화국 정권에 대해서 매일 데모하고 그랬는데, 그 정권의 하수인으로 어떻게 일하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국내 현장에 와서 광주에 있는 호남 고속도로 확장 현장에서 일했는데 그때 저의 파트너가 한국도로공사 감독관들이었어요. 그분들과 같이 일을 하다보니까 우리 분야는 공공파트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는 걸 많이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런 공공정책을 만들고 하는 일이 건설업체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더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술고시준비를 시작했죠. 회사 다니면서 주경야독을 했어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현장사무실에서 계속 고시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현장에 있으면서 마음먹고 딱 2년 공부했는데, 군 복무기간 5년을 끝내기 바로 전에 운좋게 합격했어요.
지금은 토목직렬에서 한 20명 정도 선발하는데 그때는 5명 정도 뽑았어요. 공무원이 되어보니 건설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정책이라는 것이 정책의 수요자들에 대한 생각을 읽는 게 중요한데 건설회사에서 근무해봤으니까 정책이라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 산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이 뭔지 알 수 있었어요. 그건 경험을 하지 못했던 사람에 비해서는 정말 큰 재산이었죠. 그래서 현실감이 있는 정책들을 많이 입안할 수 있었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콜라라도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석사, 박사학위를 받으신 세부분야는 어떤 분야이고 이후에 대학에서 연구하시는 분야와 어떤 관련이 있으신지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야간대학으로 다녔어요. 공대 토목과에는 야간과정이 없어서 환경대학원에 가서 공부했죠. 이때 도시교통관리를 전공했어요. 당시에 제가 수도권신도시(분당, 일산 등) 교통 담당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야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박사학위도 그쪽으로 연결했으면 더 쉬웠겠지만 박사학위는 사무관시절 유학가서 건설경영 분야를 공부했어요.
construction management로 정한 이유는 공무원이 직접 구조 계산하고 해석하고 수학 문제풀고 그런 건 아니기 때문에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데 제일 가까운 분야가 construction management쪽이었기 때문이에요. 건설경영, 건설관리였죠. 건설경영분야 중에서 리스크관리를 했어요. 리스크관리 쪽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현장 근무했던 경험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령받은 현장이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있는 고속도로 현장이었어요. 고속도로 공사의 실행률이 200%, 6천만 불에 수주를 했는데 1억 2천만 불에 끝난 현장이었어요. 거의 두 배로 적자를 본 현장이었어요. 그거 때문에 저희가 6개월 월급도 못 받았죠. 굉장히 어려운 현장이었습니다. 요즘도 우리 기업들이 해외에 가서 적자 보는 현장이 많이 있는데. 저의 첫 직장 프로젝트가 적자 프로젝트였어요. 그 당시에는 왜 적자가 났는지 그런 부분에 문제 인식이 없었죠. 이거 뭐 재수 없는 현장을 만났나보다 또는 저가로 낙찰 받아서 그랬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유학가서 공부를 하면서 리스크관리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듣다 보니까 그때 경험했던 프로젝트가 딱 뇌리를 스치는거에요. 이게 리스크관리였구나. 그래서 제가 해외건설 리스크관리를 박사학위 테마로 잡은 거에요.
인생은 다 이렇게 커넥션이 있나봅니다. 옛날의 경험이 박사학위 주제로 연결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학교로 가서 해외 리스크관리로 연구를 하면서 나름대로 프로젝트도 많이 수행하고 논문도 많이 쓰고 연구 성과도 많이 냈어요. 제가 그 당시에 대학졸업 후 사우디라는 현장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저에게 없었을 기회였죠. 그런 것들이 나중에 다 퍼즐조각처럼 엮어지더라고요. 미래는 모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자기가 열과 성을 다해서 살다보면 결국 그게 큰 조각처럼 맞춰지는 때가 온다,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이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콜라라도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유학을 가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유학 생활 중의 추억이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처음에 유학 갈 때는 2년 간 석사만 하고 올 생각으로 떠났어요. 그때가 공무원 생활 한 5~6년차인데 정말 바빴어요. 주말도 없이 수도권 신도시 건설현장으로 전쟁터에 가는 것처럼 출근해서 입주 다 시키고 도시기반시설 다 깔고, 오늘 연구원으로 인터뷰 오시는 길에 지나왔던 자유로 도로건설도 하고 분당과 일산까지 연결되는 지하철까지 놓았어요. 그렇게 일하면서 5~6년 되니까 지치더라요. 주위에 보니까 유학을 많이 가길래 저도 재충전을 하고 싶어 열심히 토플 공부해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가서 처음에는 골프도 배우고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6개월 정도 지나니까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석사만 하려고 했지만 construction management 공부에 재미를 붙였고 마침 석사 졸업할 때 쯤 석사 지도 교수님이 공부 더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어요. 당시에는 2년 끝나면 당연히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알아봤더니 연장이 가능한 분야가 있었어요. 전통 분야는 안 되고 첨단 과학기술 분야는 공무원이 박사학위 받을 수 있도록 4년까지 연장 가능하다 해서 제가 construction management는 첨단 과학분야에 해당한다고 잘 설명해서 정부에 제출했더니 허락해 주었어요. 정말 우연한 기회가 찾아와서 공부를 더 하게 되었죠. 제가 95년에 유학을 갔고 2년 석사 마치고 박사 들어간 게 97년 5월인데, 박사과정 들어가자마자 우리나라에 IMF가 터졌어요. 그때 정부지원금도 나오지 않았고 정말 힘들었어요. 처음에 석사 2년은 등록금도 나오고 생활비도 나왔는데 연장기간에 드는 비용은 전부 자기부담이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환율이 2천원까지 올라가 도저히 감당이 안돼서 포기하고 귀국하려 했어요. 귀국하려고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지도교수를 찾아가 너무 힘들어서 저는 돌아가야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면 되겠냐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교수님이 제가 공무원인걸 아니까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는 줄 알고 지원을 안 해주신 거에요. 사실 정부에서 지원금 끊겼고, 아이도 둘 있고 지금 환율이 2천원까지 올라가 도저히 내가 여기서 지탱할 수 없다 그랬더니 장학금과 일을 주셨어요. 그래서 박사학위를 받고 유학을 마치게 됐어요. 참 고마운 분이죠.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지금도 연락드리고 하면서 지냅니다.

 

2001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신데, 학교로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9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2년 근무하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연세대에서 construction management분야 전공교수를 채용하려고 적임자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construction management분야 전공자가 당시 거의 없었어요. 저는 그냥 공무원 생활에 도움이 되려고 이쪽분야에서 학위를 했는데 2001년에 연세대에서 건설경영관리분야 신임교원 채용 공고가 난거에요. 주위에서 저를 알고 있는 연대동문들이 한번 지원해봐라, 당신을 위한 자리다라는 거에요. 그런 이야기에 솔깃하긴 했지만 사실 고민이 많이 되었어요.
건설교통부 차관을 지내신 김건호 선배님이 계신데 서울공대 토목과 22회 선배이신데 공무원 할 때 제 멘토였거든요. 제가 초임 사무관으로 배치 받은 곳이 분당 일산 신도시 기획실이었어요. 그 분이 저의 첫 직장상사이고 학교선배시죠. 보통은 학교선배들이 잘 챙겨주지 않는데 이 분은 달랐어요. 눈에 안 보이는 데서 저를 굉장히 챙겨주셨어요. 제가 유학에서 돌아오니까 그 분이 건설교통부 차관으로 계셨어요. 찾아가서 연세대에서 교수 채용을 하는데, 주위에서는 가라는 사람도 있고, 또 계속 공직에 있어야지 왜 가느냐라고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고민을 말했습니다. 그 당시 차관님이 한 1분 동안 가만히 눈 감고 계시다가 딱 한 마디로 “가쇼!” 그러셨어요. 대학으로 가는 게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위해서 또 개인을 위해서 더 좋다고 생각된다 하시면서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그 다음 과정이야 또 복잡하지만 그런 계기로 학교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에 근무하시면서 하신 일들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공무원으로 서기관까지 승진한 상태에서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로 옮겼는데 대학에서 공무원 경력을 인정을 안해줬어요. 공무원 경력은 연구교육이 아니라는 거에요. 정책이기 때문에 경력이 0이었어요. 공무원 경력 12년을 0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제가 41살에 조교수 초호봉으로 왔어요. 손해를 많이 봤죠. 처음 공대학장님께 인사하러갔더니 겁을 주는거에요. “늦은 나이에 학교를 왔네요. 2년 후에는 재임용을 해야 하는데 요즘 재임용 탈락하는 사람 많습니다. 공무원 하다 늦게 왔는데 오갈 데가 없으면 어떻게 하실거냐.”고 겁을 주시더라고요. 처음 몇 달은 부담감에 은밀히 알아봤어요. 국토교통부에 다시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문의해 보니 유일한 방법은 고시를 다시 치라는 거예요(웃음). 처음에 정말 생존게임이었어요. 결과적으로는 3년 만에 부교수 승진하며 정년 보장을 받았는데 지금도 우리 집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당신 그때 그 조교수시절 3년 동안은 유학시절보다 더 눈에 불을 켜고 살더라.”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초기 3년 생존게임 한 게 밑바탕에 깔려서 다음 연구 하는데 큰 밑천이 되어서 그 이후부터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초기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와서 좀 어려움이 있었죠. 연세대에서는 서울대 학부출신이 굉장히 마이너한 그룹이에요. 연세대 전체 교수 중에 연세대 출신이 75% 이상이고 서울대 출신이 10%가 안 되었어요. 처음에는 견제도 많이 받고 중요한 일도 안 맡겼어요. 한 5-6년 지나고 나니까 연대 그룹에서도 포용해 주고 공대 부학장 보직도 맡겨주고 했습니다. 이번에 원장으로 올 때도 되게 좋아하고 총장님도 직접 축하도 해주시고 했어요..


원장님의 다양한 경력이 현재 원장직을 수행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나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예를 들면 영악하게 자기 것만 챙기는 학창생활을 했으면 아마 지금의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 그런 친구도 있었어요. 아주 영악하게 자기 것만 챙기고, 자기 공부만 하는 학생이 있었죠. 그런 친구들은 지금 어디 보이지도 않아요. 서울대 동문이라고 다 잘 되는 거는 아니잖아요. 동문들 중에 한 50대가 되어서 드러나는 친구들은 공통적으로 꾸준함이 있어요. 꾸준함이 있고 젊은 시절부터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그 다음에 우리 지역공동체, 커뮤니티에 대한 공감능력이 있고 주변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있어요. 소위 고민하는 젊음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학창시절 때 치열하게 생각을 하고, 그 이후에도 뭔가 지속적으로 순간순간을 노력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이 있어요. 그런 친구들이 나중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사회의 리더가 되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학창시절부터 고시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유학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대학 교수 해야 되겠다는 생각, 연구원장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봤지만 순간순간 살아가면서 그런 기회가 왔어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저는 거기에 순응 하면서 제 역할을 하는거죠. 우연히 기회가 왔고,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그 자리가 제가 맞더라고요. 저의 과거 경험을 필요로 하는 자리로 부각이 되고, 그러니까 순간순간 노력하고, 순간순간 관계망을 확장하고, 자기가 해야 될 일, 해야만 하는 일, 그런 일에 집중하다 보면 반드시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가 나타날 것이고, 그 기회를 잡으면 된다고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 학생들을 보면 고민은 굉장히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 다음 스텝이 없는 것 같아요. 제 아들도 지금 대학교 2학년인데, 가끔씩은 나 때는 저렇게 살지 않았는데 왜 저럴까 하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그 당시에는 제 아들과 다를 게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 때는 치열한 고민과 행동이 있었어요. 요즘 젊은 학생들에게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치열함이 없는 것에 아쉬움이 있어요.


건설기술연구원에서 주로 수행하고 있는 연구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연구원의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연구원 자랑도 좀 부탁드립니다.


최근 우리 분야의 이슈를 보면 화재 문제도 있고, 지진 문제도 있고, 재난 문제도 있어, 미세먼지 등 건강에 관련된 문제도 있어요. 우리 국민들의 키워드가 지금은 안전과 삶의 질 쪽에 많이 가 있는 거죠. 우리 연구원이 하고 있는 많은 업무 중에 바로 국민의 안전과 편리한 삶에 관련된 일들이 많습니다. 전통건축물의 화재 안전도 우리 연구원에서 담당하고 있고, 지진에 튼튼한 구조물을 만들거나 건축물을 만드는 부분도, 싱크홀 문제를 다루는 부분, 홍수, 재해 및 재난 이런 부분들 모두 우리 연구원에서 연구하고 있는 주요테마들입니다. 최근엔 스마트시티, 스마트건설, 극한건설 등 전통적인 영역을 벗어난 부분까지도 연구를 확장하고 있어요. 정부연구기관으로 과학기술분야에 25개 연구원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국민의 안전에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연구원이 바로 건설기술연구원입니다.

 

연구원을 책임지는 최고경영자로서 구성원들에게 강조하시는 것들은 어떤 부분인지요? 2018년에 연구원 차원에서 가장 크게 염두해 두고 계획하고 구상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계획하고 있는 것들이 많죠. 최근에 남북이슈가 있잖아요.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에 SOC(사본간접자본시설)나 건축물을 대량으로 조기에 공급해주는 그런 건설기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연구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남북 간 건설에 관련된 법 제도도 다르고, 설계 및 시방기준(도로폭, 포장 두께, 재료 품질기준 등)도 다릅니다. 남한보다 훨씬 추우니까 건축물의 난방 기준 등 여러 건설기준이 다른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표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안 해왔어요. 우리 연구원에서 기준 통합문제와 건설기술의 교류방안을 모핵하고 있습니다. 스마트시티도 중요한 분야입니다. 스마트시티에서 ICT분야도 중요하지만 ICT를 활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하는 게 도시이고, 도시의 헤게모니를 잡는게 건설환경분야라고 생각돼요. 저는 “스마트시티는 4차산업형 건설기술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이다”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스마트건설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신기술들을 건설분야에 접목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겁니다. 우리 연구원에 건설산업혁신센터를 만들었는데 지금 1층에 7개 창업기업들이 들어와 있어요. 벤처창업기지를 만드는 거죠. 예를 들면 대학생들 대상으로 아이디어 공모전을 하는 거죠. 아이디어가 괜찮으면 우리 연구원의 박사들이 멘토 역할을 하고 그 청년들이 졸업하면 여기 와서 우리가 제공한 창업 공간을 활용하는 거죠. 여기에서 인큐베이팅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멘토링, 재정적 지원, 컨설팅 역할 등을 해줍니다. 창업센터를 앞으로 더 확대해서 30여개 벤쳐기업을 동시에 입주시킬 수 있는 규모로 확대시킬 생각입니다. 남북통일로 가는 한 축과 첨단 기술분야의 한 축을 가지고 건설산업을 미래형산업으로 바꾸고 우리 청년들에게 창업의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건설기술연구원에는 우리 서울 공대 동문들이 많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잘 하고 있는 면은 당연히 많을테니 접어두고, 동문님이 보실 때 특히 후배 동문들에게 어떤 면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기회에 우리 동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학생들이면 능력은 기본적으로 다 있죠. 하지만 사회를 보는 문제인식이 공학도들이 좀 약해요. 공학도들은 수학문제는 잘 푸는데 사회문제를 잘 못 풀어요. 사회를 보는 시각을 좀 넓혀야 하고 그다음에 우리 커뮤니티, 지역사회에 대한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을 키워야합니다. 공학자로서 리더가 되려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죠. 순간순간 꾸준하게 최선을 다하다보면 나중에 20~30년 지나면 퍼즐조각들이 맞춰지는데 우리 동문들이 생각보다 꾸준함이 좀 부족해요. 이거하다 안 되면 저거하고 그러죠. 꾸준함이 없어서 아까운 재능들을 발휘 못하는 동문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 연구원에는 서울대 동문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어요. 입사는 많이 하는데 대학으로 많이 가버리죠. 이곳에 와서 이 좋은 연구인프라를 이용해 연구해서 논문 쓴 다음에 대학으로 갑니다. 우리 동문들이 꾸준함도 없고 때로는 영약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미련 없이 떠납니다. 오히려 우리 연구원의 주축은 서울대출신보다 수능 점수는 몇점 떨어지지만 사명감과 조직에 대한 로열티를 가지고 열심히 근무하고 연구하는 그룹들이예요. 그래도 50대 중반 이후의 그룹에는 서울대 출신들이 많이 있어요. 그 분들은 대학으로 안가고 여기에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입니다. 젊은 그룹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동문님께서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요즘 제가 생각하는 좌우명은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책임도 맡지 마라.”입니다. 제가 여기 올 때도 그 생각으로 왔어요. 여기는 무거운 의사결정을 많이 해야 되는데 제가 의지할 곳은 없어요. 결국 그 결정을 제가 이 자리에서 해야 돼요. 얼마 전에도 제가 비정규직 전환 문제 때문에 며칠 밤을 고심하면서 결정을 했는데, 결국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거에요. 비정규직 196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정부출연 연구기관 중에 제일 숫자가 많습니다. 주위에서는 왜 이렇게 많이 했느냐 비판과 걱정도 많지만 제 나름대로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노조와 석 달을 협상 했습니다. 노조집행부와 경영간부진들 앞에서 “내가 책임질테니까 이렇게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결정은 제가 해야 되는 거니까요. 그게 요즘 저의 좌우명이죠.

 

한승헌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


한승헌 동문은 1961년 제주에서 태어나 1980년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입학하였고 졸업 후 삼호건설에서 5년간 근무하였다. 이후 기술고시를 거쳐 건설교통부에서 근무하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해외건설 리스크관리분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1월부터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이전 국토교통부 재직 시 수도권신도시 도시기반시설계획, 건설R&D로드맵 및 건설기술진흥기본계획, 전국간선도로망중기계획 등을 수립했으며, 한국시설안전공단 및 전문건설공제조합 사외이사, 해외건설전문가포럼 대표, 대한토목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미국 토목학회(ASCE) ‘올해의 최우수 저널논문상’을 2회 수상한 바 있다. 현재 한국공학함림원 정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